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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하는 삶/사제글

2005년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by 수영루치아 2005. 5. 29.

5월 29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복음 : 요한 6.51~58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강론

어떤 섬에 성당이 두 곳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본당의 신부님들께서는 사이가 별로 안 좋으셔서 왕래 없이 그냥 지내고 계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사순시기가 되어서 한 쪽인 A본당 신부님이 고해성사를 볼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A본당 신부님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서 고해성사를 보기로 했는데,

그래도 걱정은 되셨는지 밀짚모자에 선글라스를 끼고 고해소로 들어갔습니다.

사제라고 밝히지는 않고 고해를 다 했을 쯤 B본당의 신부님이 약간의 흥분된 목소리로 보속을 주시더랍니다.

"크게 죄를 지은 것이 없으니 보속으로 묵주기도 5단만 바치세요."

긴장된 순간 속에서 이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기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나오려는데

이런 말이 덧붙여지더랍니다.

"단, 성모송이 한 번 끝날 때 마다 십자가의 길을 한 번씩 하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화가 난 A본당의 신부님은 정신을 차리고 본다으로 돌아와서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십자가의 길을 했답니다.

여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때 이번에 B본당 신부님에게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A본당 신부님 놀려주고는 여름에 배타고 육지에 나가서 고해성사 받고 들어오려고 했는데,

그만 태풍 때문에 뱃길을 놓친 것입니다.

성탄을 하루 앞둔 날 B본당 신부님은 마침내 고해성사를 보러 A본당 신부님께 갔답니다.

물론 가기 전에 노래방에 가서 엄청나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목을 다 쉬게 만들어 놓고 갔답니다.

고해를 마쳤을 쯤 A본당 신부님은 아무것도 모르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보속을 주더랍니다.

"형제님, 미사를 참여하면서 사제의 입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올 때 마다

십자가의 길을 한 번씩 하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B본당 신부님은 너무나 감격해서 지난 사순 때 자신이 한 일을 뉘우치며 돌아왔고,

다음 날 기쁜 마음으로 성탄 미사를 드렸답니다.

B본당 신부님은 성체축성과 영성체 예식을 마친 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성체를 분배하기 위해 제대 앞으로 내려오다가 그만 기절초풍의 표정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체를 모시기 위해 줄 서 있는 수백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잠시 웃자고 한 말이지만, 저는 가끔 미사 가운데 성체분배를 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님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프라도'라는 재속사제회의 모임에 나가고 있는데,

그 회의 창설자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은 저의 사제 생활의 지표입니다.

아직 시성되지 않아 복자품에 계신 그분은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다-Sacerdos Alter Christus'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제목 하에 세 가지의 항목을 두셨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구유는 가난이며, 사제는 헐벗은 사람이다.'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갈바리아로 자기 자신에게 죽어야 하며, 사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세 번째는 '감실로 그것은 사랑이며, 사제는 먹히는 사람이다."라고 부연 설명을 합니다.

성체분배 때 바로 이 세 번째 항목이 잠든 제 영혼을 쿵쾅거리게 만듭니다.

사제가 먹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맛있는 빵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과연 제가 그렇게 맛있는 빵이 되고 있는지 너무나 죄스럽기 때문입니다.

빵이 맛이 없다면 먹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나 많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맛있는 빵으로 다가서십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도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를 떠나 사막으로 들어서면서 '만나'라는 빵을 먹고도 죽어갔지만,

예수님은 사막 한가운데서 우리를 먹여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가난의 사막에서, 내적인 공허감의 사막에서,

감정의 혼돈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끝없는 유랑길의 양식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 곁을 떠나 세상에 내려오는 순간부터 나그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집에 들러 함께 음식을 드시고 기쁨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그분은 돈 많은 사람들, 권력이 있는 사람들조차 배척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즐겨 음식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가난에 찌들어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들,

병들어 하느님을 외면하는 사람들, 야바위꾼, 고리대금업자, 세금징수원, 창녀 등 당시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을 맞이하는 이들은 기뻐했고, 주님 스스로도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들로부터 받은 오해와 사랑의 결핍을

오직 아버지와의 사랑으로 극복해 가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은 단순히 기억되거나 내게 모셔지는 것으로만 그칠 수 없습니다.

쪼개지는 주님의 몸은 나눔이며, 당신이 흘리신 피는 용서와 화해 그리고 일치입니다.

참된 용서와 화해 없이 함께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여지껏 살아온 나를 고집하고,

이해 못한다 해서 거부해 버리는 그런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르스의 성자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영성체를 통해 받는 놀라운 은총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자주 영성체를 하면 우리 영혼은 꿀벌이 꽃향기로 목욕하는 것처럼

사랑의 향기로 목욕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영성체를 하는 사람은 한 방울의 물이 커다란 바다에 파묻히듯이 하느님 안에 자기 모습을 감춥니다.

그러나 이 성사를 멀리 하는 사람은 머리를 숙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물이 흘러넘치는 샘가에서 갈증으로 죽는 사람과 같습니다.

또한 팔을 내밀지 않아서 보물을 앞에 놓고도 가난하게 지내는 사람과 같습니다."

여기에 이런 말씀을 덧붙입니다.

"우리가 영성체 후 무엇을 집으로 나르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하늘나라를 옮긴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시간에 떠밀려가듯 바쁘고 지친 삶 속에서 우리는 잊어버리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잊어버린다는 것은 잃어버림을 뜻합니다.

내 존재의 의미, 삶의 목적과 소중한 사랑의 체험 등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성체성사적인 삶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부족한 제자들이지만 그래도 붙들고 거저 주시는 예수님처럼,

내게 있는 은총마저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이 감실을 벗어나 세상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아멘.


김덕원 토마 신부 (인천교구 산곡3동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