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31-37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나의 연인을 만나거든, 내가 사랑 때문에 앓고 있다고, 제발 그이에게 말해 주어요”(아가 5,8).
호세아서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아기에게 음식을 떠먹여 주고 아기가 아프면 온통 아기 생각으로 옆에서 애가 타들어 가는 엄마처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마음을 전혀 몰라줍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생략되었지만 호세아서에서 우리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구절은 11장 2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모습은 늘 그랬습니다. 아담과 하와부터, 인간은 늘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려 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늘 품어 안으려 하셨고, 사실 매번 안아 주셨습니다. 부모가 자녀와 관계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듯이 하느님도 이 못난 인간들을 결코 버리실 수 없으셔서 그대로 끌어안으시느라고 매번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왜 이렇게 나약해야만 할까요? 왜 거부를 당하고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사랑이어야 할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곧 ‘신비’입니다. 그저, 사랑 때문에 앓고 계신 하느님께는 당신의 그 상처보다 우리에 대한 사랑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쏟으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인간이 입혀 드린 그 어떤 상처보다 큰 하느님의 사랑을 봅니다. 예수 성심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드러냅니다. 오, 거룩한 마음이여!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심오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마태 11,25 참조). 또한 오늘 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3,18-19) 하고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대축일의 의미는 주님의 거룩한 마음, 곧 그분께서 몸소 보여 주신 한결같은 사랑과 그 사랑에 바탕을 둔 정의를 실천하며 인간답게 살아가라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요? 믿음을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성심의 사랑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 그 성심의 빛 속에 살아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그분의 성심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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