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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rapy 자료/영화치료

'쩐의전쟁"의 사회심리

by 수영루치아 2007. 6. 12.
쩐의 전쟁의 인기가 대단하다. 지난 주에는 시청률 33.3%로 공동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대개의 시사고발 드라마가 그렇듯이 쩐의 전쟁도 남성들이 즐겨보는 모양이다. 블로그 여기저기에서도 쩐의 전쟁이야기가 한창이다. 왜 쩐의 전쟁이 인기가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쩐의 전쟁을 보면서 어떠한 심리적 만족을 얻고 있는 것일까?


좋은 넘은 상을 받고 나쁜 넘은 벌을 받아야 한다

다른 드라마도 마찬가지지만, 시사고발 드라마를 사람들이 즐겨보는 데에는 “정당한 세계의 믿음(belief in a just world)”이라는 심리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정당한 세계의 믿음이란  좋은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받고 죄를 지은 놈은 처벌을 받는 정당한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믿는 현상이다. 권선징악에 대한 소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믿음은 착각이다. 현실은 이러한 믿음과 배치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이 제 대접을 받기 보다는 악한 놈들이 더 활개치고 잘 사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믿음 때문에 사람들은 드라마를 즐겨본다. 특히 결말을 뻔히 아는 단막극들을 즐겨보는 것이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이다. 아이들이 잘 보았던 파워레인저라는 드라마를 생각해보자. 주인공들은 처음에는 늘상 악당들에게 터진다. 그러다 자 이제 끝장나고 마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각자가 로봇을 불러내 합체시켜 악당을 단숨에 무찌른다. 일찌감치 로봇을 불러냈으면 얻어터질 필요도 없었건만.... 그러나 우리는 파워레인저가 이길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터지는 것도 즐길 수 있다.


쩐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결말을 대강은 안다. 박신양이가 돈만 밝히는 사채업자들을 쓸어내고 우리를 통쾌하게 해주리라는 것을. 그런 까닭에 박신양이가 아무리 얻어터져도 우리는 눈깜짝 안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엄청 분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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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는 지금 분노하고 있다. 물론 속으로이지만.
1백만원 빌렸더니 1년 만에 빚이 1억5천만원으로 늘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분노한다. 사채업자들의 잔혹한 빚 독촉에 누군가가 목숨을 끊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 오른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없다.

사채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만 도와 줄 돈이 없다. 악덕 사채업자의 낯짝에 보란 듯이 돈을 패대기 쳐주고, 귀싸대기 한 대 갈겨주고 싶지만 그럴 돈이 없다. 돈이 없다면 힘으로라도 이 넘들을 싹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완력조차 없다. 분노는 하더라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신세인 것이다. 결국 “뭣 같은 세상”이란 말만 되뇌일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드라마에서라도 박신양이가 나쁜 넘들을 다 응징해주길 바라고 있다. 돈만 밝히는 사채업자들을 돈으로 골탕먹여 모조리 거지를 만들어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공정한 세계에의 믿음”이 유지된다.

피해자를 오히려 나무라는 이유

공정한 세계에의 믿음이란 착각이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동화나 만화영화, 그리고 드라마를 통하여 믿음을 키워온 만큼 그것은 굳세다. 현실이 아무리 믿음과 정반대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믿음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쉽게 버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러한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오히려 애를 쓴다. 특히 공정세계에 대한 믿음과 어긋나는 현상과 마주치게 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가령 집에 도둑이 들어 1000만원의 피해를 입은 동생이 있다고 치자. 당신이라면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할까? 태반의 사람들이 “돈을 은행에 두지 왜 집에 두었냐?”, “문단속 좀 잘하지”라고 말한다. 세상에 나쁜 놈은 도둑질해간 놈인데, 오히려 피해자의 부주의를 탓하는 말들을 사람들은 입에 올리곤 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야 두 번 당하는 격이지만, 생각해보면 자기가 저지른 잘못도 있는 듯 해 뭐라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집에다 돈 둔 사람은 다 도둑맞아야 한다는 말이냐고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겠지만....,


이 경우 사람들은 불공정한 것을 원상회복시키려는 대신에 “지금 눈앞에 벌어진 현상은 불공정한 것이 아니다. 피해를 입은 쪽도 피해를 받을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라고 생각해버림으로써 자신의 정당세계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상궁을 살리라고 한 까닭

이러한 현상은 피해자 자신에게서도 일어난다. 강간을 당한 여성이 “아 내가 그때 소리를 조금만 일찍 질렀더라면”이라든지, 어린아이를 교통사고로 잃은 부모들이 “내가 그 때 아이의 손을 좀 더 꽉잡고 있었더라면”이라고 자신을 책망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나쁜 놈은 강간범이고 사고 낸 운전사이다. 결코 자신이 나빴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그러한 죄과를 받을만한 죄인이라고 스스로를 치부해버림으로써, 인과응보, 자업자득이라는 공정한 세계의 믿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드라마 전개에서도 이러한 믿음과 배치되면 사람들은 당황한다. 아직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지난번 대장금에서 한상궁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주장했던 것은 바로 공정한 세계의 믿음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한상궁 같이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최상궁 같은 악당들의 모함을 받아 죽는다는 것은 공정감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심리적인 불쾌감을 덜기 위해서 한상궁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상은 공정해야 한다고 믿지만, 현실은 그것과는 180도 판이한 사회. 그러나 그것을 되돌릴 능력은 없는 우리. 결국 우리는 쩐의 전쟁이라는 드라마를 통하여 박신양이가 한바탕 해주는 것을 보면서 공정감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넘들이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열중하고 있는 탓에 벌어진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