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하는 삶/사제글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 김덕원토마신부님

수영루치아 2015. 8. 2. 15:20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 김덕원토마 신부님

 

오늘 독서는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인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강짜를 부립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그런데 탈출기 1, 13-14는 이렇게 전합니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선술집에서 주객의 지독하고 어이없는 술주정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번엔 그런 무지막지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을 봅시다.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하십니다.

다음 날 아침 이스라엘 사람들은 술에서 확 깬 기분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무엇이냐?” (13절) 하하하.

강짜 부리는 사람보다 더 강짜를 놓으시는 하느님,

당신 백성과 만나시는 하느님께서 만들어내신 재미있는 에피소드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짧은 에피소드는 우리의 영적 여정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동네 놀이터에 다섯 살 난 꼬맹이가 놀고 있습니다.

얼굴과 온몸엔 검댕이 투성이입니다.

이때 아버지 목소리가 들립니다.

‘누구야!’ 아이는 지저분한 자신의 모습과 같이 놀이하고 있던 친구들을 모두 잊은 채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귀엽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때 아이가 멈칫하면서 아버지 품에 안기기를 주저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이 더러운 모습으로 아버지 품에 안기면 아버지도 더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이 더러운 모습에 아버지가 화를 내시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하고 있는 아이를 본다면

그 아버지의 마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다섯 살보다 더 어린 꼬맹이일 겁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 앞에서 투정도 부리고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강짜도 놓고,

또 하루의 일을 쉼 없이 재잘거리다가 잠들기도 하면 안 됩니까?

여러분들 그런 꼬맹이를 품에 안고 흐뭇해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이런 하느님의 모습에 흐뭇한 마음, 위로받는 느낌을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생명의 빵을 먹고 마신 분들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요한 15, 15)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이 빈말인 줄 아십니까?

빈말이 아닌 줄 아시면서 여러분들은 왜 그렇게 예수님을 어렵게 대하십니까?

다정한 개구쟁이들처럼 벗으로, 우정으로 사귀자고 하시는데

괜히 재벌 아들, 권력가의 아들 대하듯 멀찍이 떨어져서 주저주저하는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 한 말씀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저 내가 친구에게 하듯 아니면 친구보다 더 친한 친구처럼 그분을 대해야 할 겁니다.

더불어 아버지라고 해 놓고 내 아버지가 아닌 듯 그분을 대하면 그분께서는 너무 슬퍼하십니다.

주님은 이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믿음,
저도 오늘 말 나온 김에 미사 성체 모시고 조용한 데 가서 오랜만에 주님께 강짜 좀 놔야겠습니다.

김덕원 토마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